<쏘울 메이트, 내게로 와: 김미진-음현정 2인전>

soul MATE, 내게로 와.
영혼을 치유하는 이미지 놀이터

< 김미진, 음현정 2인전 >



김동일(서강대 강사)



치유로서의 미술

(마11:28)"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진다. 교회에 나가라는 얘기가 아니다. 이미 내 영혼마저 교회를 찾기엔 너무 차고 단단해져 버린지 오래. 그러나 이 풍진 세상살이, 어딘가에 잠시 쉬어갈 곳이 모질게도 필요하다. 물론, 난 그 쉴곳이 한 곳 있다. 돌아갈 집이 있고, 기다리는 아내가 있고, 늘상 유쾌하게 날 맞아주는 아들놈들이 있으니. 난 이른 새벽 일을 마치고 집으로 스며든다. 아내의 품으로 자고 있는 아이들 곁으로 숨어든다. 현실의 투쟁이 극렬할수록 내게 가족은 천국이다. 내 정신의 모태이자 육신을 치유하는 쉼터이기도 하다. 나는 정확히 예술이 또한 그러하다고 믿는다. 난 여전히 아내를 처음 보았던 20년전의 시선으로 예술을 본다. 내 상처받은 영혼, 불쌍한 영혼을 아름답게 보듬어 주는 어떤 것, 그것이 미술일수 있는 것.

갑자기 맹렬하고 표독한 혀로 미술의 감미로움을 읊어내려니, 당황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사실이다. 예술은 분명 아내이자 어머니이며, 대지이며, 모성이기도 하다. 미술은 상처를 품어 아픔을 고스란히 빨아내곤, 원래의 그것에 온전한 삶으로 되돌려낸다. 예술은 영혼을 치료하는 병원이며, 작가는 치유자이기도 하다. 내 뱀같은 분석의 혀는 이점을 부정하고자 저항하고 또 저항하지만, 어쩔 수 없는 사실이며, 이 사실은 또 역사를 통해 증명되어 왔다.

여기 김미진, 음현정의 2인전이 열린다. 두 작가는 어쩌면, 내가 위에서 신파적인 어조로 읊었던 '치유로서의 미술'의 어떤 점을 유치하지 않은 방식으로 보여주는 듯 보인다. 여기서 '유치하지 않은 방식'이라는 어휘는 매우 중요하다. 어차피 현대라는 탈마법의 시대에 그들 역시 신비한 영혼의 샤만으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술에서 깨어난 미술, 그것이 여전히 치유의 한 방법일 수 있기 위해선, 이미지의 문법으로 이미지의 의미내용으로 그것의 구체적인 프로세스를 서술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 실패한다면, 그것은 씨알도 먹히지 않을 얘기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버려진 것들의 속삭임, 김미진의 보수-가구

김미진은 버려진 가구들을 가져온다. 그것은 누군가의 손길과 아주 오랫동안 만났으되, 그 손길에 의해 마모되었고, 상처받았고, 또 그 손길에 의해 버려진 것들. 한때, 가장 사랑받았으나, 가장 비참하게 버려진 것들. 그것들은 또 온전히 버려지지도 못한채, 어딘가의 창고와 다락을 전전하다고 김미진의 눈에 띄었던 것이다. 그는 버려진 것들을 쓰다듬고 어루만지며, 관찰한다. 사소하거나 더이상 회복될 수 없는 그것들의 상처를 응시한다. 이제 그것들은 김미진에 의해 또 다른 존재로서 정당성을 회복할 것이다. 김미진의 미학은 이른바 '보수-가구'라 할 수 있다. 그의 '보수'란 결국 오브제가 갖는 기능의 변환이면서 동시에 미학적 전략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의 보수작업이 최초의 기능을 변환하고 굴절시켜낼수록, 즉 최초의 그것에 대한 현재적 변환 결과가 다르면 다를 수록 의미의 차별성은 좀더 확장되기 때문이다. 이 의미의 확장은 또한 가구공예를 전시장에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미학적 오브제로의 변환이기도 하다. 동시에 그것은 치유이기도 하다.

눈길을 끄는 것은, 김미진이 철학을 전공했다는 것. 사실 단토가 어디선가 "최고의 예술작품은 논문이다"라고 말한 이래, 철학적 사유는 현대미술을 추동하는 중요한 힘이 된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그녀의 전공이 철학이라는 사실은 그리 새삼스럽지 않다. 그러나 어차피 예술이 결국 개별 예술가의 사유의 경로를 따라 차별성을 갖는 의미의 궤적이라면, 철학을 전공했다는 사실은 김미진 작업의 특성을 설명하는 하나의 키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즉, 그저 흔히 회자되어지는 것처럼 '재미있으니까' 그런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김미진은 그의 작업의 철학적 근거를 물었을 때, 주저없이 데리다의 해체철학을 꼽는다. 결국 그의 보수 작업은 가구이면서 예술작품이며, 가구도 아니고 예술작품도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가능한 오리지널 형태는 유지하되 보수하는 부분만 현대인의 삶의 방식과 취향에 맞도록 형태를 변형시킵니다. 그렇게 제작된 작업은 가구점으로도 갈 수 있고, 전시장으로도 갈 수 있습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집안에 설치되어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의미의 유희, 가구와 작품 사이를 미끌어져 들어가며, 가구의 기능과 존재를 훼손했던 이항대립을 무화시키는 것이다. 즉, 버려진 최초의 오브제를 그렇게 버리도록 만들었던 바로 그 인식의 폭력성, 즉 기능/비기능의 경계를 없애는 것이다. 공예, 즉 기능의 관점에서 소모되다가 버려질 수밖에 없었던 그것들에 예술작품으로서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공예와 순수예술 사이에 경계를 모호하게 하면서, 오브제를 치유하는 것. 그 치료는 기능적인 복원, 혹은 새로운 기능을 부여하는 과정까지를 포함하는 데, 그것들은 가구로서도 쓸모있고, 예술작품으로서는 더 정당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음현정, 이끼 아래에서 돋는 영혼의 속살

음현정의 작업 역시 특별하다. 김미진의 치유가 오브제를 새롭게 가공하는 것이라면, 음현정의 치유란 바로 자신을 치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가 딱히 무슨 상처를 갖는다거나, 상처를 갖었어도 다른 어떤 이들의 그것보다 더할 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 역시 다른 사람이 갖는 상처를 갖지 않을 리 없도 없다. 그는 특히나 소외받은 어떤 것들, 예컨대 썩어가는 날것들, 흑, 식물에 애틋한 관심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음현정이 구사하는 이미지는 세상을 보는 시선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자신을 치유하는 것은 결국, 세상을 이미지적인 층위에서 치유한다는 것이며, 자아와 타자, 타자와 타자 사이의 존재론적 평형을 수립한다는 것이다. 지난 몇년간 그는 '이끼'에 집착하고 있다. 이끼란 무얼까. 이끼란 "선태식물 지의류에 속하는 은화식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 대체로 잎과 줄기의 구별이 분명하지 않고 고목이나 바위, 습지에서 자란다." 즉, 가장 버림받은 환경에서 가장 맹렬하게 번식하는 생명력이다. 이 생명은 역설적으로 가장 작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끼에 관한 음현정의 상상적 은유는 바로 고통과 절망마저 삶의 자양분으로 흡수하는 힘이다. 그것은 그녀의 상처, 그리고 그녀의 상처가 대표하는 만큼의 우리의 상처에 아주 작은 모습으로 피어 나 그 밑에 두텁고 풍성한 새살을 준비한다.

이끼. 아주 작은 생명이지만 가장 완전한 형태를 확보한 식물. 소박한 완전성이라 할까. 작가는 욕망과 과장, 스펙타클과 격한 투쟁으로 점철된 병든 세상이 필요한 것은 실상 아주 작고 소박한 평형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하는 걸까. 이끼가 이번에는 뽀얀 캔버스 내부가 아니라 틀거리를 타고 피어 오르고 있다. 캔버스는 층층이 쌓여 있다. 그것들은 적어도 의식의 층위에서만큼은 출산을 전후한 지난 몇년간 방치되었던 공간이다. 그 공간의 비어있음을 그는 이제 채워나가려 할 것이다. 물론, 이끼는 캔버스의 틀거리를 거슬러 올라, 내부에서 또 무엇인가를 뒤덮거나, 아니면 그 자신이 이미지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쏘울 메이트, 호기심에 대한 책임감

넬슨 굿맨의 말처럼, 예술은 어떤 초월적 본질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범례 exemplar로 존재한다면, 김미진과 음현정의 작업들은 예술이 보여줄 수 있는 치유의 속성을 가장 분명하게 현실화하는 사례들로 보고 싶다. 그들의 치유는 오브제와 이미지를 통해 나타나는 일종의 미술 테라피라 할 수 있다. 이 치유적 상상력이 근본적으로 치유하려는 대상은 결국 바로 우리-관객이다. 갤러리 현장에서, 그리고 여타의 경로를 타고, 그들의 이미지에 도달하는 관객의 시선이다. 버려진 보잘 것없는 목제품이 빛나는 자개옷을 입고 또 다른 기능과 예술작품의 의미를 담고 선 김미진의 보수-가구 제품 앞에서, 그리고 캔버스 속에서 때로 캔버스 밖에서 세밀하고 정교하게 빚어지며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이끼를 보면서, 왠지 모두의 눈과 의식이 편안해 지는 자리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김미진과 음현정은 기꺼이 예술이 영혼의 동반자임을 증거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또 영혼의 치유자들일 수 있다. 이들은 복잡한 사회적 삶 속에 찌든 우리들을 부르고 있다. <쏘울메이트, 내게로 와>, 김미진 음현정 2인전에 붙여진 제목의 이유이기도 하다. 거대도시 서울의 가장 후미진 곳에서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는 상상의 놀이터, 이곳은 갤러리 호기심에 대한 책임감이다. <쏘울 메이트, 내게로 와>는 2007 호기심 동인(동인)들의 비평적 전시기획 가운데 하나. 호기심 동인이란 미술평론가이자 지난해 부산비엔날레 바다미술제 전시감독을 맡았던 독립기획자 류병학과 그의 친구들로 구성된 비공식적 비평모임이다. 이번 전시의 기획에는 류병학과 이은화(갤러리 호기심에 대한 책임감/대안공간 충정각 큐레이터) , 김동일(서강대 강사) 등이 참여했다. 총 8회로 구성된 전체일정 가운데 벌써 7번째. 전시 오픈은 11월 5일(월) 오후 5시, 25일까지 휴일없이 진행된다. 문의는 이은화 큐레이터 016-846-2093.

by 아트레이드 | 2007/11/09 05:04 | 트랙백 | 덧글(0)

트랙백 주소 : http://artrade.egloos.com/tb/974326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