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3월 01일
art+culture_food
브라더, 시스터, 그들과 즐기던 그 맛

누군가 말했다. 생김새답지 않은 입맛이라고. 조그만 눈, 발름한 코, 생기다만 것 같은 작은 입까지 너무나 ‘동양’스런 생김새다. 그런데 입맛만큼은 뉴저지 뒷골목의 ‘오닐’ 형님과 닮았다. 된장찌개와 순두부백반은 일인분을 채 해결하지 못하면서 ‘햄벅’과 ‘코크’는 얼마든지 소화할 수 있다. 그것은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 메뉴이며, 낮에 먹고 밤에 먹어도 물리지 않는 식단이다.
‘햄버거’를 처음 ‘경험’한 것은, 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대 진학을 계획하고 다니게 된 화실에는, 또래 남자아이들이 잔뜩 있었다. 여학생만으로 구성된 학교에서 벗어나, 남자아이들과 것도 홍콩배우마냥 예쁘장하게 생긴 남학생들과 매일 새벽녘까지 지내는 것은, 두근두근 가슴이 뛰고 신나는 일이었다. 우리는 툭하면 화실을 빠져나와 자판기 음료수를 뽑아 먹고, 건물 벽에 기대서서 어른스럽게 대화를 나눴으며, 포장마차에서 파는 어묵을 먹었다.
끼리끼리 몰려다니면 그곳이 어디라도 별로 상관없었지만 사실 포장마차는 좀처럼 폼이 나지 않았다. 미술을 배우기에, 그림을 그릴 줄 알기에, 다른 아이들보단 나름 ‘세련되다’ 자부하는 우리였는데, 밤 늦게 샐러리맨들이 들르는 포장마차에서 어묵을 먹고 있노라면 너무나 ‘보헤미안’스럽지 못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발견한 곳이 ‘댈러스’라는 햄버거 가게였다. 댈러스에서 파는 햄버거는 대(大)자 화이트 포스터칼라 2개를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렇잖아도 ‘돈 덩어리 딸’이라 불리던 참이었다. 교습료와 재료비로 달마다 돈이 물 새듯 새는 딸이었다. 비싼 햄버거를 먹고 있노라면, 자동으로 엄마 얼굴이 오버랩 됐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댈러스’와 ‘햄버거’의 매력은 치명적이었다.
동그랗게 생긴 그 메뉴는 몇 입 베어 물면 반달 모양이 되었다가, 조금 더 먹어치우면 부채꼴 호처럼 변하고 종국에는 깔끔하게 흔적을 감춰버렸다. 그 맛 또한 예사롭지 않아서, 짭쪼롬하고 달짝지근한 양념에 쌓인 야채와 육류는 위장뿐 아니라 뇌 속까지 든든하게 채워줬다. 처음엔 친구들과 어울려 먹을 ‘폼 나는’ 메뉴가 필요했던 것이었는데, 점점 ‘주객은 전도’되어 햄버거를 먹기 위해 형편과 기호가 맞는 아이들과 어울려 다녔다. 참 오만불손하고 불경하기 짝이 없던 시기였다.
그렇게 맺어진 햄버거에 대한 믿음과 전폭적인 지지는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참 대단한 일이지? 2년이 멀다하고 직장을 옮긴다. 음악과 영화는 몇 해 마다 좋아하는 장르가 바뀐다. 심지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살짝 휜 새끼손가락까지 한 없이 예뻐 보이던 사람과도 세월이 지나면 데면데면해 진다. 그런데 유독 햄버거에 대한 애정을 사그라질 줄을 모르니 말이다.
김기라가 캔버스에 채워 넣은 스터프(stuff)들을 들여다보다 나도 모르게 오른손을 내뻗었다. 그 곳에 바로 한결같이 애정을 내 쏟는 햄버거가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것과 말도 못하게 어울리는 ‘코크’가 놓여있기 때문에. 그림의 본질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라면, 김기라의 작품은 본질을 재대로 갖춘 작품임에 틀림없다. 적어도 햄버거에 대한 취향과 애정이 필자 같은 사람이라면 말이다. 누구에게는 사탕이, 누구에게는 과일이, 또 어떤 이에게는 담배가 그렇겠지만 그림에 등장하는 ‘푸드’는 침샘과 중뇌는 물론 기억의 미각을 자극하는 강력한 메신저다. 너무나도 치명적인. 글 Sieon 미술산문가

누군가 말했다. 생김새답지 않은 입맛이라고. 조그만 눈, 발름한 코, 생기다만 것 같은 작은 입까지 너무나 ‘동양’스런 생김새다. 그런데 입맛만큼은 뉴저지 뒷골목의 ‘오닐’ 형님과 닮았다. 된장찌개와 순두부백반은 일인분을 채 해결하지 못하면서 ‘햄벅’과 ‘코크’는 얼마든지 소화할 수 있다. 그것은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 메뉴이며, 낮에 먹고 밤에 먹어도 물리지 않는 식단이다.
‘햄버거’를 처음 ‘경험’한 것은, 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대 진학을 계획하고 다니게 된 화실에는, 또래 남자아이들이 잔뜩 있었다. 여학생만으로 구성된 학교에서 벗어나, 남자아이들과 것도 홍콩배우마냥 예쁘장하게 생긴 남학생들과 매일 새벽녘까지 지내는 것은, 두근두근 가슴이 뛰고 신나는 일이었다. 우리는 툭하면 화실을 빠져나와 자판기 음료수를 뽑아 먹고, 건물 벽에 기대서서 어른스럽게 대화를 나눴으며, 포장마차에서 파는 어묵을 먹었다.
끼리끼리 몰려다니면 그곳이 어디라도 별로 상관없었지만 사실 포장마차는 좀처럼 폼이 나지 않았다. 미술을 배우기에, 그림을 그릴 줄 알기에, 다른 아이들보단 나름 ‘세련되다’ 자부하는 우리였는데, 밤 늦게 샐러리맨들이 들르는 포장마차에서 어묵을 먹고 있노라면 너무나 ‘보헤미안’스럽지 못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발견한 곳이 ‘댈러스’라는 햄버거 가게였다. 댈러스에서 파는 햄버거는 대(大)자 화이트 포스터칼라 2개를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렇잖아도 ‘돈 덩어리 딸’이라 불리던 참이었다. 교습료와 재료비로 달마다 돈이 물 새듯 새는 딸이었다. 비싼 햄버거를 먹고 있노라면, 자동으로 엄마 얼굴이 오버랩 됐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댈러스’와 ‘햄버거’의 매력은 치명적이었다.
동그랗게 생긴 그 메뉴는 몇 입 베어 물면 반달 모양이 되었다가, 조금 더 먹어치우면 부채꼴 호처럼 변하고 종국에는 깔끔하게 흔적을 감춰버렸다. 그 맛 또한 예사롭지 않아서, 짭쪼롬하고 달짝지근한 양념에 쌓인 야채와 육류는 위장뿐 아니라 뇌 속까지 든든하게 채워줬다. 처음엔 친구들과 어울려 먹을 ‘폼 나는’ 메뉴가 필요했던 것이었는데, 점점 ‘주객은 전도’되어 햄버거를 먹기 위해 형편과 기호가 맞는 아이들과 어울려 다녔다. 참 오만불손하고 불경하기 짝이 없던 시기였다.
그렇게 맺어진 햄버거에 대한 믿음과 전폭적인 지지는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참 대단한 일이지? 2년이 멀다하고 직장을 옮긴다. 음악과 영화는 몇 해 마다 좋아하는 장르가 바뀐다. 심지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살짝 휜 새끼손가락까지 한 없이 예뻐 보이던 사람과도 세월이 지나면 데면데면해 진다. 그런데 유독 햄버거에 대한 애정을 사그라질 줄을 모르니 말이다.
김기라가 캔버스에 채워 넣은 스터프(stuff)들을 들여다보다 나도 모르게 오른손을 내뻗었다. 그 곳에 바로 한결같이 애정을 내 쏟는 햄버거가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것과 말도 못하게 어울리는 ‘코크’가 놓여있기 때문에. 그림의 본질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라면, 김기라의 작품은 본질을 재대로 갖춘 작품임에 틀림없다. 적어도 햄버거에 대한 취향과 애정이 필자 같은 사람이라면 말이다. 누구에게는 사탕이, 누구에게는 과일이, 또 어떤 이에게는 담배가 그렇겠지만 그림에 등장하는 ‘푸드’는 침샘과 중뇌는 물론 기억의 미각을 자극하는 강력한 메신저다. 너무나도 치명적인. 글 Sieon 미술산문가
# by | 2008/03/01 12:02 | [art+culture]Food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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