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2월 01일
art+culture_food
절벽과 바나나

근간 이래저래 복잡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멀쩡한 얼굴을 하고도 속 시끄러운 일 한둘 쯤 갖지 않은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만, 내 손 닿지 않고는 어찌 해볼 도리가 없는 숙제들은 늘 한계치를 넘어 닥쳐오기 마련입니다. 이제 한숨 돌릴 만하구나 하고 잠시 긴장을 늦추는 순간 더 큰 게 밀려오는, 뭐 그런 식이지요. 다행히 저 어디쯤 계시다는 그분이 주신 인간의 능력은 먹는 양에 따라 크기를 키워가는 위장처럼 기특하게도 그럭저럭 그 많은 것을 해치울 만큼은 자라는 모양입니다. 그저 하루하루가 헉헉거리며 지나갑니다. 저만 그런 건 아니겠지요? 다들 그런 거 맞지요? 이렇게 동의를 구하지 않고서는 말 벌여놓은 마음이 금세 쪼그라들 것 같습니다. 거참 소심하기도 이를 데 없습니다.
산다는 것이 그렇게 매번 깜깜한 절벽과 마주하는 일인가 싶습니다. 되돌아가야 할지 아니면 어딘가로 길을 내야 할지 언뜻 답이 보이지 않는 먹먹한 순간의 연속이지요. 진경산수에 근간을 두고 있는 현대 한국화가 박병춘의 근작들 중에는 절벽을 화제로 삼은 그림이 여럿 있습니다. 특별히 경치가 좋은 곳을 흠모하여 남긴 것이 아니라, 위로는 구멍만한 하늘이 남고 아래로는 물 흐르는 흔적만 겨우 담아낸, 그저 절벽이므로 그림이 되어버린 그런 산수화입니다.
필력 좋기로 둘째가라면 서운할 그가 절벽과 마주한 것은, 화면 가득 필선을 연습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대체 내 붓이 어디까지 가나, 보고 싶었다는 것이지요. 그 붓 노니는 모양새가 하도 근사하여 화면을 꽉 채운 절벽은 그것이 진경산수의 풍경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오히려 추상화의 이미지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에 대한 세간의 평으로만 보자면 굳이 그 붓의 놀림이 어디쯤 되는가를 스스로 살피는 것은 좀 의아하게 여겨집니다. 대가들의 연습량과 어떤 경지를 향한 집요함이야 하루 이틀의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그래도 새삼스레 붓질의 크기를 가늠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을까요? 어쩌면 그 또한 절벽을 그릴 무렵, 스스로 어떤 절벽과 마주한 것이 아닐까요?
재미있는 것은 그 절벽의 풍경 속에 난 데 없이 노란 바나나 한 개가 초승달처럼 둥둥 떠다닌다는 것입니다. 낯설게 하기의 전략일까요? 바나나뿐만이 아닙니다. 같은 시절 그려낸 또 다른 절벽 그림 속에는 수박과 참외가 생뚱하니 자리하기도 합니다. 작가의 말을 빌어보자면 이렇습니다. 여름날 절벽을 찾아 사생을 다니다 보니 땀은 줄줄 흐르고 무더위는 식힐 길이 없어 문득 시원한 수박 한 덩이가 먹고 싶었는데, 그게 진경산수 속에 그냥 담겼다는 것이지요. 눈앞의 풍경이든 마음의 풍경이든 그림이 담기는 순간의 감흥은 굳이 우열을 가릴 것 없이 그림 속에 드러납니다. 그러면 바나나는 뭘까요? 허기진 순간 떠오른 든든한 간식거리 쯤 될까요?
그것이 뭐든 어떻습니까. 극단과 마주하는 순간에도 뭔가 먹고 싶다는 욕망을 갖는다는 것이 다만 신기할 뿐이지요.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본능적인 삶에의 욕망 아니겠습니까. 음식은 본능이며 문화이지요. 정신을 담아내는 필선의 유희 속에도 배고픔과 바나나의 자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요. 먹고 싶다는 본능이 끝없이 살아있다는 것이 말입니다. 절벽 같은 날들은 누구에게라도 오겠지요. 절벽과 마주하더라도, 끼니는 잊지 말고 챙기세요. 글 황록주 경기도 미술관 큐레이터

근간 이래저래 복잡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멀쩡한 얼굴을 하고도 속 시끄러운 일 한둘 쯤 갖지 않은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만, 내 손 닿지 않고는 어찌 해볼 도리가 없는 숙제들은 늘 한계치를 넘어 닥쳐오기 마련입니다. 이제 한숨 돌릴 만하구나 하고 잠시 긴장을 늦추는 순간 더 큰 게 밀려오는, 뭐 그런 식이지요. 다행히 저 어디쯤 계시다는 그분이 주신 인간의 능력은 먹는 양에 따라 크기를 키워가는 위장처럼 기특하게도 그럭저럭 그 많은 것을 해치울 만큼은 자라는 모양입니다. 그저 하루하루가 헉헉거리며 지나갑니다. 저만 그런 건 아니겠지요? 다들 그런 거 맞지요? 이렇게 동의를 구하지 않고서는 말 벌여놓은 마음이 금세 쪼그라들 것 같습니다. 거참 소심하기도 이를 데 없습니다.
산다는 것이 그렇게 매번 깜깜한 절벽과 마주하는 일인가 싶습니다. 되돌아가야 할지 아니면 어딘가로 길을 내야 할지 언뜻 답이 보이지 않는 먹먹한 순간의 연속이지요. 진경산수에 근간을 두고 있는 현대 한국화가 박병춘의 근작들 중에는 절벽을 화제로 삼은 그림이 여럿 있습니다. 특별히 경치가 좋은 곳을 흠모하여 남긴 것이 아니라, 위로는 구멍만한 하늘이 남고 아래로는 물 흐르는 흔적만 겨우 담아낸, 그저 절벽이므로 그림이 되어버린 그런 산수화입니다.
필력 좋기로 둘째가라면 서운할 그가 절벽과 마주한 것은, 화면 가득 필선을 연습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대체 내 붓이 어디까지 가나, 보고 싶었다는 것이지요. 그 붓 노니는 모양새가 하도 근사하여 화면을 꽉 채운 절벽은 그것이 진경산수의 풍경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오히려 추상화의 이미지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에 대한 세간의 평으로만 보자면 굳이 그 붓의 놀림이 어디쯤 되는가를 스스로 살피는 것은 좀 의아하게 여겨집니다. 대가들의 연습량과 어떤 경지를 향한 집요함이야 하루 이틀의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그래도 새삼스레 붓질의 크기를 가늠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을까요? 어쩌면 그 또한 절벽을 그릴 무렵, 스스로 어떤 절벽과 마주한 것이 아닐까요?
재미있는 것은 그 절벽의 풍경 속에 난 데 없이 노란 바나나 한 개가 초승달처럼 둥둥 떠다닌다는 것입니다. 낯설게 하기의 전략일까요? 바나나뿐만이 아닙니다. 같은 시절 그려낸 또 다른 절벽 그림 속에는 수박과 참외가 생뚱하니 자리하기도 합니다. 작가의 말을 빌어보자면 이렇습니다. 여름날 절벽을 찾아 사생을 다니다 보니 땀은 줄줄 흐르고 무더위는 식힐 길이 없어 문득 시원한 수박 한 덩이가 먹고 싶었는데, 그게 진경산수 속에 그냥 담겼다는 것이지요. 눈앞의 풍경이든 마음의 풍경이든 그림이 담기는 순간의 감흥은 굳이 우열을 가릴 것 없이 그림 속에 드러납니다. 그러면 바나나는 뭘까요? 허기진 순간 떠오른 든든한 간식거리 쯤 될까요?
그것이 뭐든 어떻습니까. 극단과 마주하는 순간에도 뭔가 먹고 싶다는 욕망을 갖는다는 것이 다만 신기할 뿐이지요.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본능적인 삶에의 욕망 아니겠습니까. 음식은 본능이며 문화이지요. 정신을 담아내는 필선의 유희 속에도 배고픔과 바나나의 자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요. 먹고 싶다는 본능이 끝없이 살아있다는 것이 말입니다. 절벽 같은 날들은 누구에게라도 오겠지요. 절벽과 마주하더라도, 끼니는 잊지 말고 챙기세요. 글 황록주 경기도 미술관 큐레이터
# by | 2008/02/01 11:55 | [art+culture]Food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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