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2월 15일
art+culture_society
스타일, 개인과 사회의 약속

지난 호에서 거기까지 했다. 즉, 작품과 작가를 매개하는 것이 스타일이라고. 하지만, 정작 해야했던 말은 이거다. 스타일은 결국 개인과 사회가 상호작용한 결과라는 것이다. 스타일은 바로 사회가 요구하는 바의 예술적 실천 방식이 작가의 손 끝에, 동공에, 입술에, 혀에 스며든 결과라 할 수 있다. 이 스며듦은 작가의 자발적인 전략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또 이미지 사용의 규범에 대한 직접적인 순종의 결과이기도 하다. 무슨 얘기인고 하면, 어떤 스타일을 취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어떤 스타일을 취해야만 내가 뜰 것이냐라는 치밀한 계산의 결과라는 것이다. 물론, 이 계산은 잘 나가던 스타일에 ‘순종’할 것이냐, 아니면 ‘전복’할 것인가의 상반된 반응으로 나타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일단 스타일이 그야말로 하나의 스타일로 자리잡으면, 웬간해선 변하지 않는 이미지 실천의 질서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물론, 몸과 손끝과 동공에 자리잡은 질서는 일종의 ‘성향(disposition)’이라고 부르자. 이걸 부르디외라는 어떤 먹물은 ‘아비투스(habitus)’라고 부른 적이 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그냥 ‘버릇(habit)’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다만, 이 버릇이 작가와 사회 사이에서 무한히 반복되어 굳어진 집단적 버릇이라는 거다. 작가는 자신의 스타일로 예술실천자로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관객은 또 그 스타일을 통해 이 사람이 그 사람임을 알고, 또 콜랙터 역시 스타일을 통해 이 작품이 그 사람 작품임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스타일이란 이 무언의 약속은 아무리 의식적으로 깨려고 해도 깨지지 않은 사고와 육체의 관성이기 때문이다. 난 아무리 똑바로 걷고 싶어도 오른쪽 신발 뒷굼치는 항상 더 먼저 헐어버린다. 구부정하게 치켜 올려진 왼쪽 어깨는 아무리 멀리 있어도 나의 존재를 마누라에게 먼저 알린다. 마누라와 나 사이의 약속, 이것이 내 신발임을 보증하는 가장 확실한 물증이다. 이렇게 싸가지 없는 문장, 그게 바로 나다. 개인과 집단의 경계를 가로지르면서 축적된 이 버릇은 작가에겐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개념이고, 실천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의 방식이다. 두텁게 물감을 덧칠하고, 나이프로 다시 긁어 내고, 최소한의 이미지로 나무와 사람 형상의 최소한의 경계를 설정하는 방식은 바로 박수근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시각적 가능성의 공간이자, 박수근과 사회 사이에 반복적인 관성에 의해 맺어진 약속이다. 박수근 스타일은 박수근의 존재를 작품을 통해 증명하는 일종의 지표(index)와 같은 것이다. 이 지표는 박수근 스스로가 의식적으로 깨려해도 잘 깨지지 않는 관성이다. 소위 스타일의 변화라는 의도적인 일탈이 있었다 해도 그 변이의 반경은 기존의 스타일로부터 추적가능한 범위 내에서 운동한다. 스타일은 작가라는 존재가 생각처럼 무한히 자유로운 창조자일수만은 없다는 현실을 말해준다. 이 현실은 사회적 현실이다. 스타일이라는 사회적 관성의 무게는 예술이 모든 것이 다 가능한 진공상태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최근 박수근의 <빨래터>에 대한 위작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빨래터>의 색감과 형태가 박수근이 박수근 자신과 사회집단 사이에서 지표로 삼았던 그 방식의 공간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이건 근거 없는 의혹제기로만 보이진 않는다. 이미지의 과학에 입각한 정당한 추론이며, 이 추론은 협박이나 집단적 입막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언제나 어떤 방식으로나 자유롭게 제기될 수 있는 정당한 의문이다. 글 김동일 서강대 강사

지난 호에서 거기까지 했다. 즉, 작품과 작가를 매개하는 것이 스타일이라고. 하지만, 정작 해야했던 말은 이거다. 스타일은 결국 개인과 사회가 상호작용한 결과라는 것이다. 스타일은 바로 사회가 요구하는 바의 예술적 실천 방식이 작가의 손 끝에, 동공에, 입술에, 혀에 스며든 결과라 할 수 있다. 이 스며듦은 작가의 자발적인 전략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또 이미지 사용의 규범에 대한 직접적인 순종의 결과이기도 하다. 무슨 얘기인고 하면, 어떤 스타일을 취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어떤 스타일을 취해야만 내가 뜰 것이냐라는 치밀한 계산의 결과라는 것이다. 물론, 이 계산은 잘 나가던 스타일에 ‘순종’할 것이냐, 아니면 ‘전복’할 것인가의 상반된 반응으로 나타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일단 스타일이 그야말로 하나의 스타일로 자리잡으면, 웬간해선 변하지 않는 이미지 실천의 질서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물론, 몸과 손끝과 동공에 자리잡은 질서는 일종의 ‘성향(disposition)’이라고 부르자. 이걸 부르디외라는 어떤 먹물은 ‘아비투스(habitus)’라고 부른 적이 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그냥 ‘버릇(habit)’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다만, 이 버릇이 작가와 사회 사이에서 무한히 반복되어 굳어진 집단적 버릇이라는 거다. 작가는 자신의 스타일로 예술실천자로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관객은 또 그 스타일을 통해 이 사람이 그 사람임을 알고, 또 콜랙터 역시 스타일을 통해 이 작품이 그 사람 작품임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스타일이란 이 무언의 약속은 아무리 의식적으로 깨려고 해도 깨지지 않은 사고와 육체의 관성이기 때문이다. 난 아무리 똑바로 걷고 싶어도 오른쪽 신발 뒷굼치는 항상 더 먼저 헐어버린다. 구부정하게 치켜 올려진 왼쪽 어깨는 아무리 멀리 있어도 나의 존재를 마누라에게 먼저 알린다. 마누라와 나 사이의 약속, 이것이 내 신발임을 보증하는 가장 확실한 물증이다. 이렇게 싸가지 없는 문장, 그게 바로 나다. 개인과 집단의 경계를 가로지르면서 축적된 이 버릇은 작가에겐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개념이고, 실천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의 방식이다. 두텁게 물감을 덧칠하고, 나이프로 다시 긁어 내고, 최소한의 이미지로 나무와 사람 형상의 최소한의 경계를 설정하는 방식은 바로 박수근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시각적 가능성의 공간이자, 박수근과 사회 사이에 반복적인 관성에 의해 맺어진 약속이다. 박수근 스타일은 박수근의 존재를 작품을 통해 증명하는 일종의 지표(index)와 같은 것이다. 이 지표는 박수근 스스로가 의식적으로 깨려해도 잘 깨지지 않는 관성이다. 소위 스타일의 변화라는 의도적인 일탈이 있었다 해도 그 변이의 반경은 기존의 스타일로부터 추적가능한 범위 내에서 운동한다. 스타일은 작가라는 존재가 생각처럼 무한히 자유로운 창조자일수만은 없다는 현실을 말해준다. 이 현실은 사회적 현실이다. 스타일이라는 사회적 관성의 무게는 예술이 모든 것이 다 가능한 진공상태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최근 박수근의 <빨래터>에 대한 위작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빨래터>의 색감과 형태가 박수근이 박수근 자신과 사회집단 사이에서 지표로 삼았던 그 방식의 공간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이건 근거 없는 의혹제기로만 보이진 않는다. 이미지의 과학에 입각한 정당한 추론이며, 이 추론은 협박이나 집단적 입막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언제나 어떤 방식으로나 자유롭게 제기될 수 있는 정당한 의문이다. 글 김동일 서강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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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 2008/02/15 11:02 | [art+culture]society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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