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1월 01일
아트 무비_매치 포인트
런던 현대 미술의 최신 트렌드
<매치 포인트>

우디 앨런은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1년에 한 편씩 직접 쓴 각본으로 꼬박꼬박 영화를 발표하는 현역 감독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한동안 그의 작품들이 다소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유럽에서 그는 절대적인 존경과 지지를 받고 있다. 우디 앨런은 늘 뉴욕을 배경으로 영화를 찍어왔으며, 뉴욕의 지식인 층과 예술계는 그의 영화에서 단골 소재가 되었다. 그러던 우디 앨런은 최근 뉴욕에서 벗어나 런던, 베니스, 바르셀로나 등 유럽의 유서 깊은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들을 만들고 있다. BBC의 투자를 받아 최초로 런던 올 로케이션으로 촬영한 <매치 포인트>는 최근 앨런의 행보에서 일종의 분수령이 된 작품이다.
<매치 포인트>는 2005년 발표된 미국영화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힐 정도로 큰 호평을 받았다. 신분상승의 욕망에 사로잡힌 한 청년이 재벌가의 딸과 결혼한 뒤 불륜으로 인해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과정을 그리는 이 영화는 인생과 운의 관계에 대해 서늘한 통찰력을 제시한다. 아일랜드 출신의 테니스 선수인 크리스(조나단 리스 마이어스)는 자신의 재능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런던 재벌가의 테니스 강사로 일자리를 얻는다. 그는 재벌가의 딸인 아트 딜러 클로에(에밀리 모티머)와 결혼하지만, 미국에서 온 배우 지망생인 처형의 애인 놀라(스칼렛 요한슨)에 욕정을 느낀다. 결국 놀라가 크리스의 아이를 임신한 뒤 그에게 집착하자,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재산을 포기할 수 없는 크리스는 살인을 결심하게 된다.
줄거리만 보면 삼류 드라마 같은 내용이지만, 우디 앨런은 이 통속적인 이야기를 예술의 지위로 끌어올린다. 아무리 노력하는 인생이라도 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으며, 반대로 운이 좋은 인생이라면 최악의 범죄를 저지르고도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잔인한 인생의 섭리를 빼어난 문학적 은유에 담아내고 있다. 사랑과 욕망, 열정과 질투, 배신과 죽음을 다루는 <매치 포인트>는 영화의 이야기가 유구한 전통을 가진 오페라 서사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들려준다. <일 트로바토레> <사랑의 묘약> <오셀로> 등 오페라 아리아가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성악가 엔리코 카루소의 목소리로 시종일관 깔리면서 육체적 욕망과 출세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인공 크리스의 처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매치 포인트>의 또다른 볼거리는 주무대인 런던의 풍경과 현대 미술의 면면이다. 우디 앨런은 투자자인 BBC를 만족시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런던의 명소를 영화 곳곳에 담았다. 코벤트 가든의 로열 오페라 하우스와 노먼 포스터가 설계한 스위스 재보험사 빌딩, 헤어조크 & 드 뫼롱이 리모델링한 테이트 모던 갤러리와 사우스뱅크 카운티 홀에 자리잡은 사치 갤러리까지, 런던 현대 건축의 면면을 확인할 수 있다. 극중 크리스와 클로에의 신혼 아파트로 사용된 곳은 앨버트 임뱅크먼트 지역에 실제로 있는 고가의 아파트인데, 전면이 유리창으로 되어 있어 런던 국회의사당과 템즈강의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이 아파트 내부는 아트 딜러라는 극중 클로에의 직업을 고려해 세련된 현대 회화 작품들이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특히 클로에가 오픈하고자 하는 새 갤러리 장면은 런던의 예술상이 밀집해 있는 코크 스트리트(Cork Street)에서 촬영되었다. 이처럼 <매치 포인트>는 런던 현대 건축과 미술의 최첨단 트렌드를 확인하게 하는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한다.
특히 <매치 포인트>가 보여주는 미술의 풍경에서는 1990년대 이후 런던 현대 미술 신(scene)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두 곳, 바로 사치 갤러리와 테이트 모던 갤러리를 특히 주목할 만하다. 사치 갤러리(www.saatchi-gallery.co.uk)는 영브리티쉬 아티스트(Young British Artists) 운동을 통해 데미안 허스트나 트레이시 예민 등 논쟁적인 작가와 작품을 배출하면서 전세계 미술 시장을 좌우해왔는데, 영화 초반 크리스와 클로에가 데이트하는 장소로 등장한다. 한편 산업혁명 시대의 유물과도 같은 화력발전소를 재개발한 테이트 모던 갤러리(www.tate.org.uk)는 극중 크리스와 놀라가 극적으로 재회하는 곳이다. 갤러리의 구조와 전시 작품들이 그대로 카메라에 담겨 있어 런던 여행자들의 추억을 상기시킨다. 현재 사치 갤러리는 첼시 지역으로 이전해 2008년 재개관을 앞두고 있는 상태. 테이트 모던 갤러리 역시 2012년 런던 올림픽을 앞두고 확장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 두 갤러리의 공식 웹사이트도 반드시 방문해볼 만하다. 세계 최고의 ‘인터랙티브 아트 갤러리’라 할 만한 이 사이트에서는 소장 작품을 확인할 수 있으며, 전세계 아티스트들이 직접 업로드하는 새로운 작품들을 전시해 수많은 아트 딜러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뜨거운 경매 열기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인터넷 아트 갤러리가 거의 없는 국내 미술계가 반드시 벤치마킹해야 할 부분이다. 글 한선희(자유기고가)
# by | 2008/01/01 22:30 | [art+culture]movie | 트랙백 | 덧글(0)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