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4월 19일
스타작가 탄생비화_앤디 워홀
미국의 소비주의와 대중문화를 이용한 순수미술의 성공
오리지낼러티를 부정한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

워홀의 작품 중 최고가인 6,400만 달러에 팔린 작품
“사업을 잘 하는 것이 가장 매력적인 예술이다. 돈을 버는 것은 예술이고 노동하는 것도 예술이며, 굿 비즈니스가 최고의 아트다.” - 앤디 워홀
2007년 세계 미술경매 시장에서 낙찰총액 부문 1위는 변함없이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에게 돌아갔다. 그의 작품들이 기록한 2007년 경매 낙찰총액은 4억 2,000만 달러. 더욱 놀라운 사실은 무려 74점의 작품이 100만 달러 이상의 가격에 낙찰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그린 카 크래시(Green Car Crash)>(1963)는 6,400만 달러(약 624억원)에 낙찰되며, 앤디 워홀 작품 중 최고 낙찰가 신기록이 탄생하기도 했다.
미술시장을 지탱하는 힘은 작품의 오리지낼러티(originality)다. 즉, 지구상에 유일한 작품이라는 희소성으로 인해, 작품가격이 높아지는 것이다. 이 같은 미술시장의 속성을 고려해 볼 때, 실크 스크린으로 대량생산을 했던 작가인 워홀의 작품이 세계 최고로 잘 팔리는 작가라는 점은 다소 의외다.
워홀에게도 좌절이 있었다
1949년 카네기 공과대학(현 카네기 멜론 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한 워홀은 잡지 삽화가 및 광고 제작 등으로 순수예술과는 거리가 있는 커리어를 시작한다. 이쪽에서 성공가도를 달리던 워홀은 한편으로는 순수미술계에의 입성을 위한 시도를 지속한다. 1960년대 이후 보여줬던 자신감 넘치는 언행과 도발적이고 센세이셔널한 작품의 시도, 그리고 단토와 같은 엄청난 예술철학자가 한껏 치켜세운 점 등을 비춰볼 때, 그는 순수미술계에서 처음부터 주목받으며 시작했을 것만 같다. 그러나 그에게도 실패가 있었다.
그 중 하나가 1956년 뉴욕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 New York)으로부터 그의 드로잉 작품 <신발(Shoe)>을 소장해 달라는 요청이 거부당했던 일이다. 당시 뉴욕 현대미술관의 컬렉션 디렉터인 알프레드 H. 바 주니어(Aflred H. Barr Jr.)는 앤디 워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심사숙고 끝에 위원회는 작품을 컬렉션에 추가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음을 전하게 되어 유감이다. 극도로 제한된 전시공간과 저장공간 때문에, 제공되는 많은 선물들을 거절해야만 함을 설명 드립니다. 드물게 전시될 듯 한 작품을 받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위원회는 당신의 우리 컬렉션에 대한 관심 표현에 감사를 드린다고 전해달라 합니다. … 추신: 드로잉은 당신이 편할 때 언제든 미술에서 가져가도 됩니다.”(1956년 10월 18일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앤디 워홀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편지에서는 컬렉션 디렉터 바 주니어는 워홀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공간 부족 때문에 드로잉 한 점을 받을 수 없다는 변명은 무척 궁색해 보인다. ‘드물게 전시될’ 작품을 받을 수 없다는 표현에서 워홀의 작품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지 않음이 명확히 드러난다. 추신은 한 술 더 뜬다. 작품을 보내주는 것도 아니고, 워홀보고 찾아가라고 한다. 한 마디로 1956년 당시 뉴욕현대미술관이 보기에 워홀의 작품은 ‘꽝’이었던 셈이다.
미국 사회에 대한 통찰력과 팝아트의 선구자
이 같은 설움을 겪은 워홀은 1962년 아티스트로서 드디어 빛을 보게 된다. 뉴욕에서 가장 유명한 갤러리 중 하나인 제니스 갤러리(Zenith Gallery)에서 <새로운 사실주의자들(NewRealists)>을 통해 처음 미술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워홀은 전시에서 그 유명한 캠벨 수프 캔이나 코카콜라 병을 선보였다. 본격적인 팝아트(pop art)의 시대를 연 것이었다. 덕분에 워홀은 선배 작가들과 비평가로부터 호되게 욕을 먹었다. 추상표현주의의 대가 윌렘 드 쿠닝은 워홀에게 “예술과 미를 죽인 살인마”라고 공격했다. 같은 해 12월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렸던 팝아트 심포지움에서는 워홀과 같은 작가를 소비주의에 “굴복했다”(capitulating to consumerism)고 비난했다. 어쨌거나 간에 캠벨 수프 캔 덕에 워홀은 미술계에 확실히 눈도장을 찍었다.
2년 후인 1964년 <미국 수퍼마켓>이라는 전시에서 워홀은 일반 대중과 처음으로 맞닥뜨리게 되었고, 그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도대체 이 같은 대중의 반응은 어디서 왔던 것일까? 사실 워홀의 팝아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960년대의 미국의 시대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960년대 미국은 1929년 있었던 경제 대공황의 후유증을 완벽히 극복하고, 이른 바 소비자본주의가 지배하던 시기다. 이제 사람들은 먹고 살만 했고, 넘치는 상품 속에서 기호를 소비하기 시작하며, 텔레비전이 보급되며 대중스타와 브랜드를 찾기 시작했다. 1961년에 당선된 케네디 대통령 역시 대중매체가 낳은 첫 번째 대통령으로 기록되고 있다. 즉, 미국 특유의 대중문화와 소비주의가 확실히 뿌리를 내린 시대였다. 이 같은 사회적 상황을 워홀은 절묘하게 파고든 것이다. 예컨대 워홀은 코카콜라를 그린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미국의 위대함은 가장 부유한 자나 가장 가난한 자나 본질적으로 같은 상품을 사는 전통을 미국이 시작했다는 점이다. … 모든 코카콜라는 똑같고, 모든 코카콜라는 좋다. 리즈 테일러도 이 사실을 알고, 대통령도 알고, 부랑자도 알고, 당신도 안다.” 워홀은 그야말로 미국사회 자체를 예술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미국 컬렉터와 대중이 열광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그는 항상 완벽한 타이밍을 노리는 작가였다. 워홀의 유명한 마릴린 몬로 작업은 1962년 그녀의 사망 직후 만든 것이었고, 젊은 시절 리즈 테일러의 모습 역시 그녀가 죽음의 고비를 넘겨 한참 대중의 관심이 몰렸을 때 시작한 작업이었다. 이처럼 그는 고매한 미술, 일상과 유리된 예술을 전면 부정하고, 미국 시민 바로 옆에 있는 이슈를 예술의 소재로 가져갔다. 그리고 대중문화와 소비주의 시대가 열린 미국사회에서 대성공을 낳았다.
그럼에도 실크스크린 작품이 수십억~수백억원에 거래되는 점은 이해하기 힘들다. 이는 그가 팝아트의 선구자이고, 최초로 실크스크린을 이용한 대량생산 작업을 했다는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대중생산과 소비 시대에 실크스크린 작업이 가지는 의미가 특별했다고 할 수 있다. 어느 분야든 선구자의 시도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의 가치를 갖는 법이다.
미국의 대중스타 워홀
워홀의 작품이 비싸진 이유에는 워홀 스스로 대중스타가 된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워홀은 어록이 존재할 정도로 대중이 원하는 멋진 말을 할 줄 아는 작가였다. 여기에 대중스타를 이용한 작업을 통해 스스로를 스타로 만드는 전략은 적중했다. 그렇다면 워홀의 작품이 미국 밖에서도 비싸게 팔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워홀의 세계적 인기는 미국문화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사실 워홀은 미국인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물론 다른 국가의 국민이나 미술계에 의미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현재처럼 엄청나게 높은 가격대를 형성할 정도는 아니라고 해야 겠다. 미국 예술이 최고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더 나아가, 미국의 대중문화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워홀의 작품은 누구나 갖고 싶어진다. 덕분에 아무리 워홀이 대량생산을 했어도, 작품이 모자랄 수밖에 …. 그리고 워홀은 “굿 비즈니스가 최고의 예술”이라는 자신의 말을 너무나 잘 실현하고 있다. 글 민병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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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 2008/04/19 22:27 | 스타작가의 탄생비화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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