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작가탄생비화_잭슨 폴록

미국미술과 폴록, 그 뜨거운 관계에 대하여
사상 가장 비싼 그림을 그린 작가, 잭슨 폴록

Hans Namuth, Jackson Pollock, 1950. Courtesy Pollock-Krasner House, East Hampton, New York.


2006년 11월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1912.1.28~1956.8.11)의 <넘버 5(No. 5)>(1948)가 무려 1억 4,000만 달러(약 1,360억원)에 팔렸다. 미술시장에서의 기록이기도 했지만, 미술사에 기리 남을 사건이었다. 왜? 하나, 이 금액은 미술품 거래 역사상 가장 높은 액수이기 때문이다. 둘, 이 기록의 주인공이 바로 폴록이었기 때문이다. 폴록은 미국 현대미술 최고의 거장이지만 상대적으로 미술시장에서 저조한 성적을 면치 못했다. 이 점에서 <넘버 5>가 사상 최고가 그림이 된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셋, 폴록이 미국작가라는 점이다. 폴록은 미국 현대미술의 태동이자 표현주의 패러다임의 가장 성숙한 단계였던 추상 표현주의의 거장이었다. 문제는 미술시장에서 그 명성에 걸맞지 않는 가격에 거래되어 왔기 때문이다. 물론 걸작들은 이미 미술관 소장이라 그렇다 할지라도 이는 다소 의아한 부분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폴록의 <넘버 5>가 사상 최고가 그림이 된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유럽미술 Vs. 미국미술
데이빗 갈렌슨(David W. Galenson)의 논문 <잭슨 폴록은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현대화가인가?>(Historical Methods 35(3), 2000)에 따르면, 1980년 이래 영어로 출판된 미술사 서적들에 미국화가 중에서는 폴록의 그림이 가장 많이 삽입되어 있었다(표1). 다시 말해, 적어도 영어권 미술계에서 가장 인정하는 미국 작가라는 뜻이다. 그런데 미국미술에서 근대 이래 세계 미술계로 확장하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갈렌슨의 또 다른 연구 <걸작과 시장: 왜 가장 유명한 현대회화는 미국 작가의 작품이 아닌가>에서 시행했던 서지조사에 따르면, 미술사 서적에 가장 많이 삽입된 그림은 피카소의 <아비뇽 처녀들>(1907)이었다. 10위까지 순위에 미국 화가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표2).
갈렌슨은 미술사 교과서들을 조사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어떤 분야든 교과서는 패러다임에 가장 보수적 옹호자이다. 미국미술 최고의 화가가 유럽화가들 순위권 다툼에 끼지 못 했다. 오늘날 미술계는 뉴욕 중심으로 움직이지만, 근현대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평가되는 장소는 파리라는 것이다.
미국미술에 대한 유럽미술의 우위는 미술시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006년 6월 구스타브 클림트(Gustav Klimt)의 <아델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I(Portrait of Adele Bloch-Bauer I)>(1907)이 1억 3,500만 달러(약 1,310억원)에 팔려 사상 가장 비싼 그림이 되었을 때만 해도, 사상 가장 비싼 그림 10위권에는 미국 그림이 부재했다(표3). 상황은 2006년 10월 드림웍스 공동대표이자 미국미술 최고의 컬렉터 데이빗 게펜이 폴록의 <넘버 5>를 1억 4,000만 달러라는 사상 최고가에 팔며 전환되기 시작했다. 곧 이어 추상 표현주의의 또 다른 대표 작가 윌렘 드 쿠닝의 <여인 III>이 두 번째로 비싼 그림이 되었다. 2007년에는 색채 추상으로 유명한 미국화가 마크 로스코의 <화이트 센터>와 미국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의 <그린 카 크레쉬>가 가장 비싼 작품이 되었다. 어떻게 폴록의 그림은 가장 비싼 그림이 될 수 있었을까?
사실 이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다. ‘왜 여태껏 폴록의 그림은 비싸게 팔리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미술사적으로는 확실히 미국미술의 영향력이 유럽미술보다 뒤처지지만, 시장에서는 이야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은, 아니 뉴욕은 세계 최대의 미술시장이다. 그런데 미국 대표화가 폴록의 그림은 생각보다 비싸게 팔리지 않았다. 2005년까지 <넘버 12>가 1,165만 5,500 달러(약 116억원), <넘버 8>이 1,155만 달러(약 115억원)에 팔렸던 예가 가장 비싸게 거래된 예 중 하나였다. 이는 워홀보다도 하다못해 허스트의 작품가보다도 낮은 가격이다. 사적거래에서도 5,200만 달러(약 520억원)에 거래된 것이 최고 기록이었을 정도였다(정윤아 《미술시장의 유혹》, 2007). 이유가 무엇일까?

미국미술의 성장과 함께 한 잭슨 폴록
우선, 폴록이 미술시장의 스타로 부상하지 못했던 이유를 찾기 전에 폴록이 왜 미국미술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가 되었는가에 대해 알아보자. 잭슨 폴록은 1912년에 태어났고, 본격적으로 미술을 공부한 것은 1929년부터였다. 당시에는 (네이티브 아메리칸의 미술은 차치하고 볼 때) 미국만의 미술이란 것은 부재하던 시절이다. 아실 고키, 한스 호프만과 같은 유럽 작가들이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미국으로 망명해 서서히 미국에도 현대미술이 발생하던 시점이었다. 심지어 폴록과 함께 미국에서 태동한 추상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윌렘 드 쿠닝도 네덜란드인이었다.
1947년 폴록은 커다란 캔버스를 이젤 대신 바닥에 놓고 물감을 뿌리기 시작했다. 드립 페인팅(drip-painting)의 출현은 미국미술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미술은 단지 유럽미술의 아류에 불과했다. 이 상황을 미국인 폴록이 방법론의 측면에서 타개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물론 폴록의 드립 페인팅은 단순한 방법론인 동시에 작품의 내용이기도 하다.) 이로써 추상표현주의라는 하나의 사조가 확실히 자리매김하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아서 단토(Arthur C. Danto)가 지적했듯) 추상표현주의는 회화의 평가기준이 외부세계를 얼마나 완벽히 재현하는가라는 질문 대신, 개인의 감정과 심리상태를 얼마나 잘 표현하는가의 문제로 전환된 표현주의 패러다임의 귀결점이었다. 인간의 심리적 공황과 불안감을 잘 표현한 것으로 유명해 영화에서도 패러디되었던 뭉크의 <절규(The Scream)>(1893)에서도 왜곡되었지만 인간의 형상을 재현하고 있다. 이후 추상표현주의에 이르기까지, 화가들은 어떻게 하면 인간의 심리를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폴록의 드립 페인팅에 이르면, 외부세계를 반영하는 그 어떤 형상도 찾을 수 없다. 즉, 그는 표현주의를 그 극단으로까지 몰고 갔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어떤 분야든 소위 ‘뜨는’ 방법은 단 두 가지다. 하나는 새로운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의 문제를 유지하되 혁신적 해법을 제시하는 것이다(토마스 쿤(Thomas S. Kuhn),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1962). 전자는 혁명을 일으며 새로운 패러다임의 창시자로 남는 방법이고, 후자는 기존 패러다임 하에서 천재로 인정받는 방법이다. 이 중 폴록이 택한 방법은 후자였고, 이는 아주 정확한 ‘전략’이었다. 미국현대미술은 유럽으로부터 ‘이식’되어 온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 모든 다른 분야에서 그랬듯이) 미국미술은 주도권을 쥐고 있던 유럽미술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유럽미술에서 보여주지 못했던 새로움을 보여주는 동시에 유럽미술과 소통 가능해야 했다. 당연히 유럽화가들이 던져놓은 질문에 상상치 못한 기발한 방법으로 답하는 것이 ‘최선’이었다는 것이다.
폴록이 미국 현대미술계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데는 비평계의 역할도 단단히 한 몫 했다. 그 중에서도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는 폴록을 그가 활동하던 시대부터 모네와 세잔까지 이르는 시기를 통틀어 최고의 화가로 묘사했다. 미국 회화의 정당성과 당위를 입증하려 했던 그린버그의 폴록에 대한 찬사는 폴록이 미국미술의 중심에 서는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던 셈이다.
여기서 미술관과 갤러리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1945년 폴록이 또 다른 추상표현주의 화가 리 크래즈너(Lee Krasner)와 결혼한 뒤 뉴욕에 갔을 때,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 여사가 집과 작업실을 마련하는데 도와준 사실은 유명하다. 1943년 폴록의 첫 번째 개인전도 구겐하임의 금세기 미술 갤러리(Art of This Century Gallery)에서 열렸다. 폴록이 미국 대표작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중요한 제도적 실천자 중 하나는 바로 미술관이었다. 특히 모마(MoMA;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는 1943년 폴록의 첫 개인전이 끝나자마자 폴록의 그림을 샀고, 현재 폴록의 주요작품 중 무려 6점을 소장하고 있다. 1930년대에 유럽미술을 미국에 소개하는 역할을 했던 모마는 1940년대 들어서며 추상표현주의의 미국 미술관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후원자이자 홍보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 실제로 1940년부터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의 작품을 사 모으기 시작한 모마는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모든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의 작품을 소장하게 되었다. 이처럼 모마는 폴록을 비롯한 추상표현주의 작가들 제도권 미국미술의 중심으로 편입시키게 된다. 그리고 모마, 구겐하임 미술관을 비롯한 미국 미술관들이 세계 최고의 미술관으로 성장함에 따라 폴록은 세계무대에서도 돋보이는 작가로 성장하게 된다.
갤러리의 역할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40~50년대 미국 갤러리들은 거의 유일한 작가들의 상호교류의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미국작가들은 모여 서로 아이디어부터 사담까지 모든 것을 교류했다. 예컨대 베티 파슨스 갤러리(Betty Parsons' gallery)는 주요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의 모임공간이었다. 《뉴요커》의 평론가 캘빈 톰킨스(Calvin Tomkins)는 “바넷 뉴먼(Barnett Newman),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 클리포드 스틸(Cliford Still)은 모두 서로의 쇼를 도왔고, 베티 파슨스는 그들 마음대로 하도록 완전한 자유를 주었다”(톰킨스 <Profile of Betty Parsons>, 《New Yorker》 51)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처럼 자유로운 소그룹의 형성이 가능하게 했던 갤러리들 덕에 초기 미국작가들은 장족의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그 가운데 폴록이 있었던 것이다.

미국작가가 가장 비싸졌다
그렇다면 미술계에서는 스타로 떠오른 폴록의 작품은 왜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었을까? 우선 정윤아의 지적대로 “대표작들은 이미 주요 미술관들이 소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앞서 언급했듯이 근현대 서양 미술사에서 아직 20세기 뉴욕미술이 19세기 파리미술을 추월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이 점에서 폴록의 작품이 세계 최고가에 거래된 것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시장의 가치와 미술사적 가치가 일대일 대응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미술시장에서 폴록이 역사상 가장 중요한 작가로 부상했다. 《아트리뷰》 선정 파워 100을 보면, 상위권에 있는 인물들은 대부분 화가나 평론가가 아닌, 대규모 갤러리를 운영하는 딜러와 큰손 컬렉터들이다. 그만큼 오늘 날 미술계가 미술시장의 논리, 즉, 자본의 논리로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다. 미술사적 평가가 무엇이든, <넘버 5>의 거래 사건으로 폴록은 ‘일반적으로’ 가장 위대한 작가에 가까워 졌다. 그리고 미국미술은 세계최고의 자리에 성큼 다가서고 있다.
폴록의 <넘버 5>는 게펜이 핀테크 애드비저리 리미티드(Fintech Advisory Ltd.) 대표 데이빗 마르티네즈에게 판 것이다. 게펜은 미국인이고, 멕시코인 마르티네즈도 하버드에서 MBA를 수료했고 그의 회사는 뉴욕과 런던에 본거지르 두고 있다. 폴록이 시장의 스타로 떠오른 배경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미국 경제의 영향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돈이 많아진 미국인들이 미국 작품을 사고 팔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게펜 같은 큰손 컬렉터들이 미국미술에 열을 올리고 있어, 시장에서 미국작가들의 작품가는 점차 상승하게 되었다. 어느 시대든 그 시대를 지배하는 가치가 있고, 자본주의에는 그것이 자본이라 하면, 경제력에서 가장 앞서 있는 미국의 미술이 세계최고고, 그리고 그 스타가 미국인이라는 사실은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니다. 돈 많은 미국 컬렉터들이 구하기 힘든 근대 유럽 작품 대신 미국작품들을 찾는다면 더욱이 말이다. 실제로 역사상 가장 비싼 그림 상위에 포진한 윌렘 드 쿠닝, 마크 로스코, 앤디 워홀은 모두 폴록의 <넘버 5>가 거래된 이후에 거래된 것이다. 이처럼 미술시장 판도의 변화에 있어서도 폴록은 선구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요컨대 폴록이 스타작가로 자리매김하고 <넘버 5>가 최고가 그림이 되는 과정은 세계미술계의 판도 변화와 미국미술의 부상이 가장 주요했다. 폴록은 미국미술의 신호탄이었다. 따라서 미국에서 큰손 컬렉터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미국 미술시장이 붕괴되지 않는 한, 주요 미국 미술관들이 문을 닫지 않는 한, 미국이 세계미술계를 주도하는 한, 폴록의 예술적/시장적 가치는 계속 상승할 것이다. 적어도 현상유지는 할 것이다. 글 민병교 기자

by 아트레이드 | 2008/04/18 21:55 | 스타작가의 탄생비화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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