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페헤르(Tony Feher)>개인전_페이스윌든스타인 갤러리_3.21~4.26

재즈보다 흥겨운 토니 페헤르 개인전
재활용품은 재활용품이 아니다!

페이스윌든스타인(Pacewildenstein) 갤러리에 토니 페헤르(Tony Feher)가 첫 개인전을 갖는다. 갤러리에 선보이는 작품들은 고급스러운 캔버스에 그려진 유화작품도 청동으로 빚어진 조각과는 거리가 멀다. 작품의 재료부터가 병, 압정, 나일론, 스티로폼 등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재활용품들이다. 이것들을 다양하게 조합해 놓고는 뻔뻔하게 작품이라고 전시를 한다. 그리고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의 중요성”을 탐구한다고 말한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과 재활용품들을 이렇게 조합해 놓는 것 사이에 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재활용품은 재활용품이 아니다
재활용품은 한번 사용된 것을 말한다. 같은 화장지라도 재활용 화장지는 어딘지 부족하고 질이 떨어지는 느낌을 준다. 싸고 완전하지 못한 느낌. 이것이 재활용품이 주는 느낌이다. 그런데 토니 페헤르는 이것을 가지고 예술작품을 만든다. 재활용품을 예술로 승화한다는 진부한 발상의 일환인가? 이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페헤르의 작업은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페헤르의 작업하는 배경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페헤르는 “미니멀리즘(Minimalism)”을 토대로 이를 연장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알다시피, 미니멀리즘은 현실과 작품 간 괴리가 최소화되어야 진정한 본질을 표현할 수 있다는 가치를 근거로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미술계에서 미니멀리즘은 오브제의 본질만 남기고 불필요한 요소들을 제거하고 최소한의 색상을 사용해 기하학적 구조만 표현하는 형태의 작품들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도널드 저드(Donald Judd)의 무채색 상자들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과연 미니멀리즘에서 상정하는 본질이 무엇일까? 미니멀리즘이 상정했던 본질은 인간에 비유하자면 살이 아닌 그 골격이라 할 수 있다. 골격이 과연 인간의 본질인가? 이는 사람들마다 서로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할 수 있다. 즉, 본질에 가까워지기 위해 휘발시켜 버리는 ‘불필요해 보이는’ 것들 속에 본질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골격보다 더 근원적 본질이 있을 수도 있다는 문제제기도 가능하다. 결국 이런 방식의 미니멀리즘은 철학에서 ‘순수한’ 혹은 ‘때 묻지 않은’ 본질의 추구를 극단까지 밀고 나간 훗설의 실패를 답습하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토니 페헤르는 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대상의 본질을 표현하고자 한다. 그는 재활용품에 약간의 변형을 가하고 이들을 조합해 놓음으로써 재활용품의 본질은 재활용품으로 보이는 대상들의 다른 속성을 말하고자 한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지금 우리 눈앞에 두 개의 콜라병이 있다. 하나는 뚜껑을 뜯지도 않은 새 것이고, 다른 하나는 콜라를 다 마셔버린 병이다. 이 두 병 사이에 음료수가 채워져 있는지 여부, 사람이 입을 대고 마셨던 병이었는지 여부를 제외하면 차이가 존재하는가? 없다. 둘 다 똑같이 유리 혹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병’이다. 페헤르의 아이디어는 여기에 있다. 예술과 재활용품 간 차이가 있다면, 그것이 사용되는 맥락에 있을 뿐이지, 실제로 두 존재 자체에는 본질적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페헤르의 이야기인즉슨, 재활용품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재활용품 자체가 예술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페헤르는 재활용품을 활용해 “있는 그대로 대상 바라보기”라는 미니멀리즘의 가치를 확장시킨다.

본질을 찾는 여정, 그리고 그 한계
이를 말하기 위한 토니 페헤르의 전략은 사실 단순하다. 그가 하는 일은 ‘변형’과 ‘상황 지워주기’일 뿐이다. 이렇게 해서 재활용품을 다르게 보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재활용품을 그것이 사용되는 상황적 맥락에서 이탈시켜 볼 수 있도록 한다. 이렇게 그는 대상 그 자체를 보게 한다. 대상에 다른 맥락을 부여해, 대상을 맥락으로부터 해방시켜버리려는 전략. 흥미롭고 기발한 발상이다.
문제는 이 전략 역시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한계는 페헤르 역시 기존의 미니멀리스트와 마찬가지로 자꾸 대상이 처해 있는 맥락을 없애버리려는 데 있다. 우리는 어떤 대상이든 맥락 안에서 볼 수밖에 없다. 페헤르가 이것을 모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가 놓치는 것은 대상은 오직 특정 맥락 안에 있어야만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가 추구하는 것은 결국 무의미한 본질일 뿐이다. 무의미한 본질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실제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본질은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위치한 맥락에 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재활용품을 재활용품이게 하는 맥락에서 대상의 의미와 본질을 찾지, 대상 자체에서 찾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결코 본질일 수 없다고? 근거가 무엇인가? 이 근거를 대려면 페헤르는 우리보다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이 더 뛰어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은 증명될 수 없는 것이다. 그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면 말이다.

재즈보다 흥겨운 전시
한계가 있다고 해서 페헤르의 작품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의 작품은 일단 재미있다. 《아트위크》의 편집장 로라 리차드 쟁쿠(Laura Richard Janku)는 그가 작업하는 방식을 유명한 재즈 보컬리스트 엘라 피츠제럴드의 즉흥에 비유한다. 실제로 그의 작업들은 애초의 의도 없이 주어진 공간에서 자유롭게 ‘즉흥연주’를 하듯 진행된다. 그만큼 보는 사람의 기대와는 다른 흥미로운 점을 제시한다. 그의 전시는 ‘이제 어떻게 진행이 될까’라는 기대감과 호기심을 갖게 한다. 한마디로 페헤르는 철학적이기도 하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즐거운 감상 시간을 제공할 수 있는 작가이기도 하다. 미니멀리즘의 발전 양상이 궁금하다면, 페헤르가 제공하는 재즈적 전시가 궁금하다면, 페이스윌든스타인에서 진행되는 토니 페헤르의 개인전을 놓치지 말기 바란다. (+ 1 212 421 3292) 글 민병교 기자

by 아트레이드 | 2008/03/15 21:39 | Preview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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