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작가 탄생비화_백남준

백남준, 사회적 그물망을 지어내는 미학적 거미

타자의 세상에서 중심잡기
백남준에 관해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있을까? 그만큼 사소한 말 한마디조차 성경이 되어버린, 한국이 낳은 현대미술의 성자니깐 말이다. 그러나 짜내고 또 짜내도 여전히 새로운 영감의 근원을 주는 이들 중 하나 역시 백남준이다. 그만큼 말도 많고 탈도 많다는 것. 따라서 백남준의 스타탄생 秘史를 쓴다는 건 필자에게, 무슨 ‘숨겨둔 자식이 나타났다더라’식의 野史로 접근할 일이 아니라, 백남준의 미학적 실천의 경로를 커다란 줄기로 단순화시킨 후, 사회사의 전반적인 지평에 올려 보아야 할 부담으로 다가온다. 일단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은 백남준이 취했던 ‘미술하기(doing art)’의 차별성이다. 즉 그는 한국현대미술사에서 발빠르게 ‘현대’의 표제어를 선점한 ‘냉온탕’ 추상주의자들과는 반대의 전략을 취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한국에서 서구의 미술을 이식했다면, 백남준은 정반대의 방식 즉 서구에서 한국적인 이미지 실천하기의 방식을 취했던 것이다(구체적으론 <머리를 위한 선(Zen for Head)>(1961)을 비롯한 禪 연작, <TV 부처>(1977), <다다익선>(1988)이 그 예). 이 방식은 이응로, 김환기, 남관, 김창렬의 것이었지만, 가장 성공적인 모델은 백남준이었던 것. 이 전략은 너무나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지만, 성공했을 때의 효과는 상상을 초월할 수 있다. 가장 힘들고 모험적이지만, 가장 해볼만한 길, 백남준은 그 길을 간 것이다. 이 길을 따라 한국이라는 이미지 변방의 천출 백남준은 현대미술의 중심에 최고의 거인으로 우뚝 섰다. 
 
경계를 유영하는 물고기
하지만, 백남준의 특기는 모든 대립되는 갈등구조가 첨예하게 만나는 치열한 전선 속에 항상 자신을 위치시키는 남다른 능력이다. 평생을 오직 경계만을 따라 유영하는 물고기와 같았던 것. 그의 삶의 여정 자체가 경계의 삶이다. 일제말, 해방공간 속에서 피아노를 치고 스트라빈스키의 <불새>를 들었다는 백남준이다. 한국동란이 한창이던 52년 동경대에 입학 음악과 미학을 전공했고, 뮌헨대학교에 유학, 음악과 미술사를 배웠다니 이미 그의 삶 자체가 일반적으론 상상할 수 없는 아이러니였다. 그는 아마도 체질상 좀더 첨예한 긴장을 따라 더욱 치열한 경계선으로 이동했던 것 같다. 한국을 떠나 일본과 독일로, 또 다시 뉴욕을 거쳐 다시 고향 땅 한국으로 회귀하는 과정은 일종의 드라마와 같다. 이 과정에서 백남준은 문학, 음악, 미학을 넘나들었고, 동서의 문화와 사상을, 캔버스와 TV를, 圖上과 동영상의 대립을 넘나들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백남준은 이 경계를 유영하면서 만나는 대립되는 모든 자원들을 자신이 중심이 되는 하나의 그물망 속에 정교하게 엮어내고 또 확장시켜 냈다는 것이다. 따라서 경계 위의 여정이 계속될수록 백남준 네트워크는 그 규모나 두께, 밀도를 더해 갔다. 백남준 네트워크의 양과 질은 말년에 이르러서는 그야말로 그 자체로 경계를 넘어서는 거대한 문화권력에 도달했다. 더 경이로운 것은 그것의 확장이 백남준 사후에도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물망을 짜내는 미술 거미
백남준의 명성은 백남준 네트워크의 확장과 비례하며 증가했다. 중요한 것은 백남준이 백남준 네트워크를 확장하는 과정과 방법이다. 또 이 방법과 과정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네트워크 참여자들의 ‘이해관계를 번역(translation of interests)’해 내는 백남준의 능력이라는 것이다.1) 즉, 차별적인 참여자들, 심지어 대립적 참여자들의 이익을 상호적으로 변환시켜내고 증폭하고 강화시키는데 백남준은 남다른 수완을 보였던 것이다. 유의미한 변환의 첫 시도는 플럭서스 참여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플럭서스에 가입하면서 자신의 파괴적인 미학적 실천을 고립된 개인의 내면으로 환원시키지 않고, 일종의 전위적인 미학운동으로 확장시키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백남준은 이 느슨하게 얽힌 미학집단 내에서도 중심에 진입하는 특별한 능력을 보여주는 데, 특히 존 케이지, 요셉 보이스, 오노 요코와 같이 향후 플럭서스의 범위를 넘어서 주류 문화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핵심적 실천자와 동맹을 맺어 나갈 수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동맹을 맺어나가는 방식인데, 백남준은 그야말로 특정 참여자를 자신의 작품 내에 직접적인 콘텐츠로 삼는 파격적인 방식을 취했다. 백남준의 실질적인 데뷔라 할만한 작업이 1959년 <존 케이지에 바침(Homage a John Cage)>이었다는 점은 그런 의미에서 의미심장하다.2) 이러한 정당한 미학적 실천과 집단 운동을 통한 정합적 동맹관계는 백남준 네트워크의 확장에서 승수효과를 더했다. 예컨대 요셉 보이스의 예술적 명성이 상승할 때 백남준의 그것 역시 상승작용하는 효과를 내는 것이다. 이 상승효과는 유럽 내 백남준 연결망을 견고하게 강화시켜 주었고, 이후 현대미술의 새로운 수도 뉴욕으로 진출하는 교두보가 되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무어맨 벗기기, 백남준의 뉴욕시대.            
백남준의 뉴욕시대는 백남준 네트워크의 절정을 이룬다. 모든 문화적 경계가 없어지는 세상에서 뉴욕은 FTA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속에서 모든 투기자본의 수도이자 동시에 미술이라는 이름을 달고 확장하는 문화적 권력의 수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뉴욕 예술계에 핵심적 실천자로 확고히 자리잡으면서, 이제 백남준에겐 모든 것이 가능해졌다. 물론, 백남준의 초기 뉴욕시대는 퍽 고달파 보였다. 피아노를 때려 부수는 식의 파괴적인 퍼포먼스로는 눈길을 끌기 어려웠을 것이다. 백남준은 새로운 동반자 샬롯 무어맨과 함께 좀 더 섹시하고 대중적 흥미를 자극하는 시도를 시작한다. 백남준은 여기저기서 무어맨을 벗겼다.3) 그러나 무엇보다 뉴욕시대의 성과라면, 즉흥연주와 퍼포먼스 중심의 전위적 실험 보다는 TV를 이용한 오브제 설치가 백남준 스타일 속에서 확고하게 중심적인 위치를 점유한다는 것이다. 행위작업이 매체 작업의 내용으로 포섭된다고 할까? 물론, 여기에는 자본주의 시장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거래가능한 상품으로서의 작품을 선호하는 미국 예술계의 암묵적인 요구가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데이빗 로스, 백남준 네트워크의 미학적 후원자
무어맨과 함께 하워드와이즈 갤러리(1969), 보니노갤러리(1971) 등을 전전하던 뉴욕시대에  에버슨뮤지엄에서의 회고전(1974)은 백남준 네트워크의 확장의 의미있는 계기를 이룬다.  데이빗 로스를 만나기 때문. 당시 담당 큐레이터였던 로스는 이후 승승장구하여 보스톤현대미술관, 그리고 휘트니미술관의 관장에 올랐고, <휘트니비엔날레 1993>과 같은 역사적 전시를 기획하면서, 동시대 세계미술을 주도하게 된다. 백남준은 후일 자기 돈 25만불을 들여 국립현대미술관에 <휘트니비엔날레 1993>을 통째로 수입하는데, 이점은 로스-백남준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휘트니비엔날레 한국전>은 당시 활력을 잃어버린 민중미술과 정처없는 실험미술이 범벅되어 있었던 대한민국 미술계에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를 열어젖힌 계기로 기억된다. 또한 로스는 현대미술의 합법적 주체로서 백남준의 위상을 세계 미술계에서 이론적으로 입증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백남준 네트워크 속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4) 1982년 휘트니미술관에서 열렸던 회고전은 뉴욕시대 백남준 네트워크의 확장에 있어서 결정적인 순간이다. 휘트니 미술관이 어떤 곳인가? 구겐하임, 모마(MoMA)와 더불어 신자유주의 문화의 종주국 미국미술을 이끌어가는 사회적 행위자이며, 동시대 미술을 미술관의 실천의 핵심적 레파토리로 격상시켰던 주역이었던 것이다. 이 회고전은 백남준의 미술사적 위치를 제도적으로 공식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비디오아트는 뉴욕 뿐 아니라 세계적인 동시대 현대미술의 공식적인 개념이 되었다.5) 이제 비디오 아트는 정당한 미술관 소장품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고, 백남준은 더 이상 무어맨을 발가벗기는 따위의 일로 대중의 관심을 끌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88 서울 올림픽, 백남준 네트워크의 국가적 확장
휘트니 회고전의 기념비적인 성공으로 말미암아 백남준 네트워크 역시 전대미문의 확장을 지속하게 된다. 자질구레한 것들은 다 빼버리고,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Good Mornig Mr. Owell)>라는 불가사의한 위성 쑈 기획이 현실화된 것이다. 뉴욕, 파리, 베를린, 서울을 인공위성으로 연결한 이 쑈는 요셉 보이스, 존 케이지, 머스 커닝햄 등 백남준 네트워크의 중심인물들 뿐 아니라 당대 최고의 유명인사들이 출연했고, 재방송을 포함 전세계의 약 2천5백만명이 시청한 것으로 알려진다. 백남준 네트워크의 전지구적 확장이 달성된 것이다.6) 이 위성 쑈가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이란 국가권력이 비로소 백남준 네트워크 속에 포섭되어졌기 때문이다.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을 앞둔 상황에서 무능하고 무식한 권위주의 독재정권은 대한민국의 문화적 세련미를 과시해야할 필요가 절실했고, 휘트니미술관에서의 회고전으로 뉴욕 예술계에서 존재를 과시한 백남준의 명성과 <굿모닝 미스터 오웰>라는 무모한 이벤트가 보여준 국제성은 그 필요를 한방에 충족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즉, 국가의 정치적 이해와 제도의 이해를 문화적으로 ‘번역’할 수 있었고, 또 훌륭하게 충족시켜 주었던 것이다. 이처럼 대한민국 국가와 방송을 포섭한 백남준 네트워크는 훨씬 제도적인 안정성을 확보하게 되었고, 백남준은 일종의 국가적 문화권력이 되었다.7)


“백남준 기념관”, 국립현대미술관
82년 휘트니 회고전 이후 80년대 후반 백남준 네트워크의 중심은 뉴욕과 대한민국을 오가는 이중적, 혹은 나선형 구조를 보여준다. 즉 뉴욕의 효과를 한국에서 확대, 강화했고, 제도적 안정성과 후원으로 번역했다. 이 제도적 안정성은 또한 뉴욕과 유럽의 다른 경쟁자들이 갖지 못한 획기적인 어드밴티지였던 것이다. 즉, 백남준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정부와 국가기간 방송사를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88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중앙회랑에 설치된 <다다익선>은 백남준 이 대한민국 예술계에서 어떤 위치에 올랐는지를 증거하는 기념비라 할 수 있다. <다다익선>은 마치 광개토대왕비가 그러한 것처럼 백남준 네트워크의 확장을 이미지로 기록한 저장물이다. 이제 한국 근현대 미술의 역사는 백남준을 중심으로 조직되고 나열되어진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거대한 백남준 기념관의 기능을 암묵적으로 수행하게 된다.8) 하지만 이 역시 국립현대미술관이 일방적으로 백남준의 명성에 굴복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그 자체로 한국예술계 내외부에서 자기 이해를 추구하며 경쟁하는 조합적 행위자(corporative actor)로서 국립현대미술관은 86년 과천 이전(移轉) 이후 소위 '국립 national'이라는 제도적 지위에 걸맞는 위상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 필요에 백남준은 자신의 작품 가운데 최대 최고의 기념비를 제공함으로써 응답했던 것이다.9) 국립현대미술관 입성은 백남준 네트워크의 국내적 확장에 또 다른 중요한 계기를 얻는데, 바로 거대자본 삼성과의 제휴가 그것이다. 불가사의한 <다다익선>의 스펙타클은 1003대의 TV를 요구하는 엄청난 작업이었지만, 삼성은 이 무모함을 현실화하는 데 기꺼이 참여했다.10) 삼성과의 제휴가 단순한 협찬만은 아닌 것이 이 제휴와 더불어 백남준 네트워크 내에 거대자본 삼성이 한국문화예술계에 개입하는 통로이자 공식적 대리인인 호암재단을 포섭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삼성-호암은 백남준 작품에 대한 거대한 제도적 콜랙터이자 후원자가 되었고, 문화적 지평에서 거대자본이 변환할 수 있는 최대한의 상징자본을 부여했다. 즉 백남준은 미술계에서 삼성과 등가로 변형되는 유일한 존재가 되었다.

비엔날레, 백남준을 기념하는 리추얼
90년대 초반은 백남준 네트워크에서 국내와 뉴욕의 핵심적 두 포스트가 정신없이 피드백하며 상승작용하는 시기였다. 88년 <다다익선>의 국립현대미술관 입성, 92년 <비디오 때 비디오 땅전>과 더불어 92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백남준은 황금사자상을 거머쥐게 된다. 95년엔 한국문화예술계의 노벨상이라 할만한 호암상을 수상하였고, 비슷한 시기에 슈피겔, 캐피탈 등의 잡지가 발표하는 세계 미술인의 영향력 순위에서 늘 게하르트 리히터, 부르스 나우만, 지그마 폴케, 게오르그 바젤리츠 등과 한자릿수 내에서 경쟁하는 세계 최고의 작가가 되었다. 더 이상 확장할 여지가 없는 포화상태에 이른 백남준 네트워크는 이제 제도적 안정화의 단계에 진입한다. 백남준은 더 이상 파괴을 일삼는 신화적인 몽상가가 아니라 이제 거대한 사회적 실재(social fact)가 되어 버린다. 백남준과 비디오 아트는 이제 긍정 혹은 비판, 혹은 호불호의 대상이 아니라, 압도적인 현실이자 더 이상 의문되지 않는 당연한 실재로 존재하게 된다. 그 실재의 모습은 95년 광주비엔날레라는 제도적인 스펙타클의 형태를 띠고 나타났다. 백남준은 광주비엔날레 설립의 미학적 근거였던 것이다. 광주비엔날레를 통해 백남준 네트워크는 국가와 미디어와 예술계와 자본을 얽어매는 웅장한 그물망을 완성하였으며, 이후 부산비엔날레, 서울미디어아트 비엔날레로 확장하게 된다. 한국에서 열리는 이 시끌벅적한 비엔날레들은 대한민국이 백남준으로부터 비롯된 매체미술의 세계적 종주국이라는 사실에 대한 선언에 다름 아니었다. 백남준은 이 보잘 것 없는 이미지 제국의 변방 대한민국이 세계미술계에서 존재감을 알리기 위한 미학적 근거가 되었다. 제 1회 광주비엔날레 특별전인 <정보예술>전은 백남준에 대한 직접적인 오마주였으며, 국립현대미술관의 <다다익선>이 그러한 것처럼 이 모든 비엔날레 행사장들의 현관에서 가장 먼저 관객을 맞는 것은 예외 없이 백남준의 작품이었다.

에피소드 한가지
동시대 미술에서 백남준은 백남준 자신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조직하였으나 어느순간 자신을 넘어서 버린 거대한 사회제도를 포괄하는 씨니피앙이 되었다. 그런데 과연 이 거대한 사회적 그물망 속에서 관객은 어떤 자리에 있을까? 창피한 일이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백남준의 작품에 참여하거나 소통해 본 적 없는 필자는 2006년 가을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아래 서강대 문화사회학 강좌 수강생들과 3차에 걸쳐 국립현대미술관에 대한 현장조사를 수행한 바 있다. 놀라운 것은 백남준에 대한 무참여 불소통은 필자만의 것이 아니었던 것. 한 인터뷰에서 피면접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Q: 저 처음에 그 다다익선 작품 보셨잖아요 그것 보았을 때 느낌이 어떠셨어요?
A: 글쎄요. 그냥 아무 느낌이 없던데요. 그 게 그냥 이게 왜 그런건가 라는 생각밖에는 안들었는데, 왜 인지도 모르겠고, 그랬어요. 그냥 많이 켜 놓은 것 밖에 느낌이 안 왔었어요.
Q: 그러면은 그 다다익선에 대해서 그냥 본인 마음대로 한번 제목을 지어주실 수 있으세요?
A: 아니...어떤 그런 생각도 안들었어요. 뭐라 이름 붙이기도 뭐하고, 뭐에요 잘 모르겠다는 생각밖에는 그냥...
Q: 그냥 아무렇게나 그냥 지어질수 있을까요 하다못해 테레비전 탑 이라던가...(웃음)
A1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 그러니까 그가 이야기를 할려면  딱 보고 느낀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어서...뭐라고 말을 못하겠어요. [A: 20대 남자]

원형 램프 어딘가에서 채록된 바 남녀의 대화는 또 이러했다.

여자: 이게(다다익선) 왜 이렇게 유명한 거야? 
남자: 몰라. 그냥 백남준이 했대...[20대 커플]

동시에 실시된 설문조사에서도 미술관련학과를 졸업한 극소수의 피조사자들을 제외하면 비슷한 결과를 얻었다. 이 점은 어쩌면 백남준에 관한 또 다른 비밀스러운 현상(秘事)를 보여줄지도 모른다. 즉 정작 우리 일상의 관객들은 거대한 백남준 네트워크가 그어 놓은 경계 밖으로 배제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관객들은 실상 미술의 聖人 백남준 이 그토록 떠들어대는데도 알아먹지 못하는 바보, 혹은 소통적 불구가 아니고서는 백남준에 접근할 수 없는걸까? 백남준 네트워크의 압도적인 현실성은 그 네트워크에 참여하고 있는 수많은 예술계의 핵심적 실천자들이 유포하고 제도적으로 강화한 문화적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허. 예술이란, 백남준의 말처럼 정말 사기가 아닐까?   김동일(서강대 강사, 문화사회학)


각주)-----------------
 그렇다. 혹자는 이미 눈치채고 있겠지만, 이 글은 과학사회학자 부르노 라투어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ctor network theory)’의 관점에서 기술될 것이다. 라투어 이론에서 이해관계 번역은 네트워크의 확장을 가능케 하는 핵심적인 개념이다. Bruno Latour, Science in Action, Harvard Univ. press, 1987 참조
 같은 맥락에서 요셉 보이스와 함께 플럭서스의 창시자에 헌정된 <조지 매키어너스를 추모하며(In Memorium George Micianus)>(1978), <머스 옆에 머스(Merce By Merce)>를 제작했고, 가장 핵심적인 동맹 가운데 하나였던 보이스 서거했을 때 <보이스 로봇(Beuys Robot)>(1988), <보이스 추모굿>(1990) 등이 제작되거나 행해졌다.
 <성인용 첼로 소나타 No. 1(Cello Sonata No. 1 for Adults Only)>는 백남준 초기 뉴욕시대의 기본적인 레파토리였다. <오페라 섹스트로니크Opera Sextronique>)(1967),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라(TV Bra for Living Sculpture)>(1969) 역시 마찬가지.
 백남준 네트워크 내에서 미학적 타당성을 입증했던 데이비드 로스의 역할은 한국예술계에서 김홍희와 이용우에 의해 수행되었다. 이들은 정교한 개념과 언어를 통해 백남준 미학을 담론적으로 대리했는데, 재미있는 것은 백남준 네트워크의 확장과 더불어 제도 내에서 이들의 위상 역시 상승해 나갔다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백남준에 미학적 근거를 두고 있으면서 대한민국 미술장 내에서 현존하는 제도의 최고 위치 가운데 하나인 광주비엔날레 전시감독을 역임하게 된다.
 당시 휘트니미술관에서 개최된 토론회에서 존 케이지, 헤어초겐라트(쾰른미술관장), 폰투스 휠텐(LA모마관장), 데이비드 로스(보스톤현대미술관장) 등이 참석해 백남준에게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로서 합법성을 부여한다.
 주지하는 것처럼 이 쑈는 이후 <바이 바이 키플링(Bye Bye Kippling)>(1986), <손에 손잡고(Wrap the World)>(1988)로 이어진다.
 이후 뉴밀레니엄 위성 쑈 <호랑이는 살아있다>(2000. 1. 1)에 이르기까지 백남준은 대한민국 국가가 요구하는 세계적 문화이벤트의 단골 레파토리 중에 하나가 된다.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동시대적 국제성을 획득하는 국가적인 과제는 특히 KBS와 같은 권력의 문화적 하부조직의 과제로 주어졌고, KBS는 백남준의 기획을 실무적으로 성실히 주관함으로써 제도적인 주체로서 자신들의 이해와 백남준의 이해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었다.
 김상수 “미술 전시란 무엇인가: 국립현대미술관은 백남준 기념관이 아니다”, 『착한 사람들의 분노』생각의 나무, 2000
 백남준과 국립현대미술관의 공생관계는 1992년 <백남준 회고전: 비디오 때 비디오 땅>으로 연결된다.
 삼성은 지난 2003년 리모델링 작업에 또 다시 현물 470대의 TV와 현금 1억원을 제공한다.

 

by 아트레이드 | 2008/03/01 21:27 | 스타작가의 탄생비화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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