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구오창: 나는 믿고 싶다>_2008.2.22~5.28_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

구겐하임이 찜한 중국작가 차이구오창 회고전

아름답지 않아 아름답고, 믿을 수 없어 믿고 싶다

 

“나는 아주 많은 수수께끼와 퍼즐을 숨겨놓았다. 교수들(professors)은 수세기 동안 내가 의미했던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쟁하게 할 것이다.” 아일랜드 출신 천재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는 일생일대의 역작 《율리시즈(Ulysses)》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가장 중요한 단어는? 두말할 것 없이 ‘교수’다. 조이스의 소설에 감춰진 퍼즐을 맞춰가며 그에게 영생을 부여하는 실천적 주체가 바로 교수니까. 뜬금없어 보이는 조이스 이야기가 여러분을 차이구오창(Cai Guo-Qiang)의 구겐하임 개인전 <차이구오창: 나는 믿고 싶다(Cai Guo-Qiang: I Want To Believe)>로 초대할 것이다.

 

아름답지 않아서 아름다운, 믿을 수 없어서 믿고 싶은

미술시장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중국작가 이름 서넛 대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 그만큼 중국미술이 시장에서 잘 나간다. 그런데 차이구오창은 뭔가 낯설다. 구데신, 황용핑, 장샤오강 등과 함께 중국현대미술의 모태인 ’85 뉴웨이브 운동에 참여했던 주요 1세대 작가로 알려졌으나, 실제로 작품을 볼 일은 거의 없었다. 흔히 접하는 중국작가의 작품이란 대부분 시장에서 잘 나가는 작가들뿐이니 당연한 일이다. 각설하고, 차이구오창은 경매나 상업화랑에서 별 ‘볼일 없다.’ 그러나 미술관에 가면 별 ‘볼일 있어진다.’ 구겐하임에서 아무나 개인전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작가는 어떤 작품을 하고 있기에 시장과 미술관의 평가에서 차이가 나는걸까? 그의 작품을 검토해보자. 회화작품 <태아 운동 II: 외계인을 위한 프로젝트 9번(Fetus Movement II: Project for Extraterrestrials No. 9)>(1991)을 보면, 화약으로 동심원을 어둡게 그려놓았다. 통념적으로 작품은 아름답지 않다. 구겐하임이 주최하는 휴고보스상에 빛나는 대표작 <우는 용/우는 늑대: 징기스칸의 방주(Cry Dragon/Cry Wolf: The Ark of Genghis Khan)>(1996) 역시 일반적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있다. 양가죽 가방과 나뭇가지, 자동차 엔진, 잡지표지 등으로 만든 용은 세계화된 시장에서 일어나는 동서양의 무역관계를 표현한다고 한다. 이와 같은 작품의 의미는 차치하고 보면, 용은 참 못 생겼다. 게다가 설치작품이라 소장하기도 까다롭다. 화약자국이 시커먼 그림이나 다양한 레디메이드로 짜깁기 해놓은 설치나 모두 ‘결코 아름답지 않다.’ ‘그래서 아름답다.’ 부르주아의 미적 기준에 반기를 들었던 아방가르드 정신이 남아있다고 해야 할까? 차이구오창의 작품은 하나 같이 반미학적 미학으로 가득 차 있다. 한마디로 ‘우리 집’에 결코 걸어놓고 싶지 않게 생겼다. 그래서 구겐하임에 걸려 있다.

컬렉터가 좋아할 수 없는 작품이 어떻게 구겐하임 같은 거대 미술관에 걸려 있는 것일까? 차이구오창의 작품세계는 구겐하임이 좋아할 만한 철학을 구축하고 있다. 이는 전시 부제인 ‘나는 믿고 싶다’에 내포되어 있다. 기획자 알렉산드라 먼로(Alexandra Munroe 구겐하임 수석 큐레이터)는 “차이에게 있어, 예술은 보이지 않는 것이나 믿음 저편에 존재하는 것에 대한 믿음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태아 운동 II>처럼 외계인이나 UFO 등을 작품에 등장시켜 일반적 시공간의 구조를 해체하고 비선형적이고 탈중심적인 구조를 재구성한다. 결코 보이지 않는 어떤 것, 그래서 믿을 수 없는, 그래서 믿고 싶은 어떤 것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동양 철학을 근거로 한다는 그의 작품세계는 학구적이어서 대중의 용이한 접근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제한된 미술시장이 원하는 작가

차이구오창과 구겐하임의 인연은 1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6년 차이구오창은 구겐하임에서 주최하는 휴고보스상을 타는 영광을 누렸다. “세계 현대미술에서 남다르게 창의적인 인물에게 주어지는 상”이라 구겐하임이 자랑하는 휴고보스상을 탔다. 이로 그는 그들만의 리그에서는 “세계적 인정”을 받았다. 게다가 2006년에 이미 독일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치렀다.

일반적 관점에서 아름답지도 소통 가능하지도 않은 차이구오창의 작품이 구겐하임에서 각광받는 이유는 ‘생산자가 곧 소비자가 되는 제한된 미술시장’의 논리가 적용되기 때문이다. 서두에서 언급한 조이스의 말에서 ‘교수’라는 말을 기억할 것이다. 《율리시즈》를 펼쳐본 이는 알 것이다. 이 한권을 읽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전문지식이 필요한지. 마지막 장 <몰리>는 40쪽 가량이 모두 한 문장이어서 읽기만도 숨이 차다. 이는 애초에 ‘연구대상’이길 자처한 소설이다. 조이스는 교수라는 어휘로 이를 대유한 것이다.

문학장이든, 미술장이든 대중을 위한 작품을 생산한다. 동시에 《율리시즈》처럼 순수문학가나 교수, 비평가 등 전문가 집단을 위한 작품도 생산된다. 전자는 대중이 크게 호응할수록 성공한 것이며, 이에 상응해 인기와 경제적 부가 뒤따른다. 반면 후자는 전문가집단인 ‘동료집단’의 호평이 최고의 명예이고 자산이다. 도대체 돈도 안 되는 일을 왜 할까? 생산자가 곧 소비자가 되는 제한된 시장의 존재는 다른 영역에 있는 사람들이 그들만의 리그에 진입하게 어렵게 만든다. 즉, 대중 지향적 작품은 대중과의 소통이라는 역할을 수행하는 반면, 집단 내부 지향적 작품은 장의 전문성과 자율성에 기여한다. 즉, 외부와 소통이 어려운 영역이 있어야만, 예술이 유지될 수 있다.

대중과의 소통과 고도의 전문성을 동시에 확보한다면 이보다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양자를 모두 획득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작가들은 둘 중의 하나의 길을 취하는데, 차이구오창은 그들만의 리그에서 인정받는 길을 택한 것이다. 이는 성공했다. 왜? 전시를 기획한 토마스 크렌스(Thomas Krens 구겐하임 디렉터)는 “차이구오창은 비범하게 창의적인 시각을 가진 초국가적 작가”라고 극찬하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위에민준이나 장샤오강의 작품처럼 잘 팔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이 한 번도 전시를 못한 세계 최고의 미술관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한다. 세계적 미술관에서의 지속적인 전시는 컬렉터를 배제한 미술계 내적 평가에서 최고의 성공을 나타내는 지표다.

 

중국미술의 저력, 그리고 구겐하임의 한계

차이구오창이 휴고보스상을 탄 1996년은 요즘 시장에서 인기 폭발인 정치팝이나 냉소적 사실주의가 태동해서 슬슬 알려질 때다. 차이구오창은 중국현대미술이 미술시장에서 폭발하기 전에 이미 긍정적인 미술계 내적 평가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는 중국현대미술이 가지는 저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동시에 구겐하임이 세계미술계의 지형도를 확장하는 예이기도 하다. 그러나 차이구오창을 제외하고 동아시아 작가들의 전시가 부재한다는 점에서, 구겐하임 역시 동아시아 미술에 대한 중국 중심의 좁은 시야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는 역으로 우리로 하여금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미술계 지형에 변화를 가하기 위한 대안을 고민하게 한다. 잘 팔리는 중국미술에 지친 여러분에게, 한국미술의 세계화를 고민하는 여러분에게 전시를 반드시 권하고 싶다. 여러분의 안목과 생각이 한층 더 업그레이드될 것이다. (+1 212 423 3500) 글 민병교 기자

by 아트레이드 | 2008/02/15 20:26 | Preview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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